
지하실 7만 달러로 세계의 의료기록을 바꾸다! 에픽 창업자이자 세 아이 엄마, 주디 포크너
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때, 의사가 모니터를 바라보며 우리의 지난 기록을 쭉 넘겨보는 장면을 떠올려 볼까요? 검사 결과, 처방 이력, 예방접종 기록까지. 그 화면 뒤에는 40여 년 전 미국 위스콘신의 한 지하실에서 시작된 소프트웨어가 있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 수억 명의 의료 기록이 이 시스템 위에 올라가 있고요.
그 소프트웨어를 만든 사람은 주디 포크너(Judy Faulkner). 프로그래머로 출발해 전자의무기록(EHR) 기업 에픽 시스템즈(Epic Systems)를 세운 창업자이자 CEO이고, 동시에 세 아이를 키운 엄마입니다. 억만장자이지만 언론 앞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가장 조용한 억만장자’로 불리는 그의 이야기를 함께 따라가 볼게요.

뉴저지 약국집 딸, 수학과 컴퓨터에 빠지다
주디 포크너는 1943년 미국 뉴저지주 체리힐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약사였고, 어머니는 ‘사회적 책임을 위한 의사회(Physicians for Social Responsibility)’를 이끈 활동가였어요. 의료와 사회에 대한 감각이 자연스럽게 몸에 밴 환경이었죠.
그는 디킨슨 칼리지에서 수학을 전공한 뒤, 위스콘신 대학교 매디슨 캠퍼스에서 컴퓨터과학 석사 과정을 밟습니다. 이곳에서 ‘의학에서의 컴퓨팅’ 수업을 들으며, 워너 슬랙(Warner Slack) 박사의 지도 아래 환자 정보를 추적하는 시스템을 직접 만들어 봅니다. 훗날 에픽으로 이어질 아이디어의 씨앗이 바로 이때 심어졌어요.
지하실에서 시작한 7만 달러, 에픽의 탄생
1979년, 포크너는 매디슨의 한 지하실에서 회사를 세웁니다. 자본금은 친구와 가족에게서 모은 단돈 7만 달러, 직원은 파트타임 보조 두 명이 전부였어요. 벤처캐피털 투자도, 화려한 사무실도 없었습니다. 오직 ‘환자의 데이터를 잘 다루는 소프트웨어’라는 한 가지 목표만 있었죠.
포크너는 스스로를 사업가보다 프로그래머라고 여겼습니다. 그에게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일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하나의 창작에 가까웠어요.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좋은 소프트웨어는 예술입니다.”
에픽은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성장했습니다. 오늘날 메이요 클리닉, 존스 홉킨스 같은 미국 최고 병원들이 에픽 시스템을 사용하고, 전 세계 2억 5천만 명 이상의 의료 기록이 이 위에서 관리됩니다. 2025년 매출은 약 67억 달러에 이르렀고요. 포브스는 일찍이 2013년, 포크너를 “헬스케어 업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이라고 불렀습니다.

투자도, 상장도, 인수도 없이
에픽의 성장 방식은 실리콘밸리의 문법과 정반대입니다. 창업 이후 지금까지 포크너는 벤처캐피털을 받지 않았고, 회사를 상장하지 않았으며, 다른 회사를 인수한 적도 없습니다. 모든 소프트웨어를 회사 안에서 직접 만들었고요.
위스콘신주 베로나에 있는 에픽 본사 캠퍼스는 이런 그의 개성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동화 속 성, 지하철 테마의 건물, 거대한 트리하우스까지. 방문객들이 ‘윌리 웡카의 초콜릿 공장 같다’고 말할 만큼 상상력 넘치는 공간이에요. 딱딱한 의료 IT 기업이 이토록 유쾌한 얼굴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창업자의 신념이 스며든 결과였습니다.
남들의 속도가 아니라 자신의 원칙대로 걸어온 결과, 포크너는 헬스케어 IT 분야에서 손꼽히는 자수성가 여성이 되었습니다. 포브스에 따르면 그는 에픽 지분의 약 42%를 보유하고 있고, 2026년 7월 기준 순자산은 약 96억 달러로 세계 부자 순위 359위에 이름을 올렸어요.
세 아이가 알려준 ‘뿌리와 날개’
포크너는 회사를 키우는 동안 세 아이의 엄마이기도 했습니다. 남편 고든 포크너(Gordon Faulkner)는 소아과 의사로, 15년 넘게 위스콘신의 아이들에게 무료 진료를 제공해 왔어요. 아이를 돌보는 마음과 사람을 돕는 마음이 이 가족 안에 나란히 흐르고 있었던 셈이죠.
그가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 온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있었던 대화예요.
“오래전 저는 어린 아이들에게 부모에게서 필요한 두 가지가 뭐냐고 물었어요. 아이들은 ‘먹을 것과 돈’이라고 답했죠. 저는 ‘뿌리와 날개’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이 대화는 그의 인생 후반부를 이끄는 나침반이 되었습니다. 2015년, 포크너는 기빙 플레지(The Giving Pledge)에 서명하며 자산의 99%를 기부하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리고 2019년, 남편과 함께 루츠 앤드 윙스(Roots & Wings) 재단을 세웠습니다. 저소득 가정의 아이들과 부모가 자신의 잠재력을 온전히 펼칠 수 있도록 돕는 곳이에요. 아이들에게 ‘먹을 것과 따뜻함, 집, 의료, 교육’이라는 뿌리를 마련해 주어, 언젠가 스스로 날개를 펼치게 하겠다는 마음이 담겼습니다.
재단은 2020년 한 해에만 120여 개 단체에 1,500만 달러를 지원했고, 지금은 포크너의 딸 셰이나(Shana)가 상임이사를 맡아 이끌고 있습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었던 가치가, 이제 다음 세대의 손을 거쳐 더 많은 가정으로 뻗어 나가는 중이에요.
조용한 프로그래머가 남긴 가장 큰 기록
주디 포크너는 무대 위에서 화려하게 빛나는 창업자는 아닙니다. 인터뷰도 잘 하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는 데 서툴러요. 하지만 그는 지하실의 작은 아이디어를 세계 수억 명의 건강을 지키는 시스템으로 키워냈고, 세 아이를 키우며 배운 ‘뿌리와 날개’를 다시 세상에 돌려주고 있습니다.
한 생명을 키워내는 일과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일은, 어쩌면 같은 마음에서 출발하는지도 모릅니다. 누군가가 스스로 설 수 있도록 단단한 뿌리를 내려 주는 일. 포크너의 이야기는 엄마가 된다는 것이 결코 멈춤이 아니라, 더 넓은 세상을 향한 또 하나의 도전이자 성장이라는 것을 조용히 증명해 보입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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