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레이 아나토미·브리저튼 만든 세 딸의 싱글맘, 숀다 라임스
화요일 오후, 회의는 아직 두 개나 남았는데 어린이집에서 전화가 옵니다. 아이가 열이 난대요. 머릿속에서 두 개의 세계가 부딪히는 그 순간, 우리는 매번 조용히 묻게 됩니다. “나는 지금, 뭘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이야기꾼 중 한 명도 똑같은 질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숀다 라임스(Shonda Rhimes)는 <그레이 아나토미>, <스캔들>, <브리저튼>을 만든 미국 최고의 TV 제작자이자, 세 딸을 홀로 키우는 싱글맘입니다. 목요일 밤 방송가를 통째로 지배하던 이 사람이, 정작 자기 삶에서는 “예스(Yes)”라는 말을 가장 두려워했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 볼까요.

여섯 남매의 막내에서, 이야기를 짓는 사람으로
숀다 라임스는 1970년 시카고에서 여섯 남매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대학 교직원이던 아버지와 여섯 아이를 키우며 뒤늦게 학위를 마친 어머니 밑에서, 그는 식료품 저장실에 숨어 통조림을 배우 삼아 이야기를 지어내던 아이였습니다. 다트머스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서던캘리포니아대(USC) 영화학교에서 시나리오를 전공하며 “쓰는 사람”으로서의 길을 다졌습니다.
그리고 2005년, 그가 만든 <그레이 아나토미>가 첫 방송을 탑니다. 병원을 무대로 한 이 드라마는 20시즌을 넘기며 미국 프라임타임 드라마 역사상 가장 오래 방영된 작품 중 하나가 되었어요. 이어 2012년 <스캔들>에서는 배우 케리 워싱턴이 약 40년 만에 미국 지상파 드라마를 단독 주연으로 이끈 첫 흑인 여성이 되며 역사를 새로 썼습니다. 그의 제작사 숀다랜드(Shondaland)는 한때 ABC의 목요일 밤 전체를 책임질 만큼 강력한 브랜드가 되었죠.
“9개월 뒤, 나는 엄마가 되었습니다”
커리어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그 시기, 숀다 라임스는 결혼이나 파트너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엄마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그렇게 2002년, 입양을 통해 첫째 딸 하퍼(Harper)를 만나 싱글맘이 되었어요. 이후 2012년 둘째 에머슨(Emerson)을 다시 입양하고, 2013년에는 대리모를 통해 셋째 베켓(Beckett)을 품에 안았습니다. 그렇게 세 딸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가장 바쁜 시기에, 가장 큰 책임을 스스로 선택한 사람. 화려한 성공 뒤에서 그는 세 아이의 밤을 지키고 아침을 여는, 우리와 다르지 않은 한 명의 엄마였습니다.
“너는 뭐든 예스라고 말하는 법이 없어”
의외로 숀다 라임스는 스스로를 벽에 붙어 있는 사람이라 부르는 지독한 내향인이었습니다. 인터뷰 전엔 공황이 올 만큼 사람들 앞에 서는 일이 두려웠고, 그래서 쏟아지는 초대와 기회에 습관처럼 “노(No)”라고 답해 왔죠.
2013년 추수감사절, 언니 델로로스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그를 멈춰 세웁니다. “너는 뭐든 예스라고 말하는 법이 없어.” 좋은 제안들을 늘어놓는 동생에게, 언니는 “어차피 너 다 거절할 거잖아”라고 답했던 거예요. 아프게도, 그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숀다 라임스는 스스로에게 약속합니다. 두렵다는 이유로 피해 온 모든 것에 1년 동안 “예스”라고 말해 보기로요. 그 1년의 기록이 바로 베스트셀러 회고록 <이어 오브 예스(Year of Yes)>입니다. 그런데 이 ‘예스의 해’에 그가 가장 크게 “예스”라고 답한 대상은, 무대나 카메라가 아니라 바로 자기 아이들과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엄마가 되는 건 직업이 아니에요”
<이어 오브 예스>에서 숀다 라임스가 모성에 대해 남긴 문장은, 일하는 엄마라면 누구나 한 번쯤 밑줄을 긋게 됩니다.
“엄마가 되는 건 직업이 아니에요. 직업은 그만둘 수 있지만, 나는 엄마인 걸 그만둘 수 없어요. 그건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이야기니까요.”
그는 이렇게도 말합니다. 집에서 아이를 돌보든, 일터로 나가든 “둘 다 엄마이고, 어느 쪽도 다른 쪽보다 낫지 않으며, 두 선택 모두 똑같은 존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요. 워킹맘과 전업맘을 나누어 저울질하는 세상을 향해, 세 딸의 엄마가 건네는 단단한 위로입니다.
대신 그는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에 진심으로 “예스”라고 답하기 시작했어요. 딸이 “엄마, 나랑 놀자”라고 부르면 노트북을 덮고 15분이라도 온전히 바닥에 앉기로요. 완벽하게 다 잘하는 대신, 지금 이 순간에 마음을 다하는 쪽을 택한 겁니다.
“모든 걸 다 해내는 사람은 없어요”
2014년 모교 다트머스대 졸업식 연단에서, 숀다 라임스는 세상이 워킹맘에게 씌우는 환상을 정면으로 깨뜨립니다.
“제가 어느 한 영역에서 성공하는 걸 볼 때마다, 그건 거의 틀림없이 제 삶의 다른 영역에서는 실패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모든 걸 다 해내는 것(doing it all)’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신화라고, 그는 졸업생들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일에서 빛나는 날은 아이 학예회를 놓친 날이고, 아이와 온종일 뒹군 날은 원고 마감을 넘긴 날이라고요. 물론 우리는 숀다 라임스가 가진 자원 — 도움을 주는 사람들과 경제적 여유 — 이 대부분의 엄마에게 주어지지 않는 특권임을 압니다. 그럼에도 그의 이 고백이 위로가 되는 건, “다 잘하지 못해도 괜찮다”는 허락을 세계 최고의 커리어우먼이 먼저 건네주기 때문일 거예요.
포브스는 숀다 라임스를 미디어·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중 한 명으로 꼽습니다. 그가 그레이 아나토미와 스캔들 등으로 디즈니(ABC)에 벌어다 준 수익은 20억 달러가 넘었고, 2017년에는 방송사를 떠나 넷플릭스와 스트리밍 업계 최초급의 독점 계약을 맺으며 약 1억 달러 규모(이후 2021년 재계약으로 확대)의 파격적인 대우를 이끌어냈습니다. 넷플릭스로 옮긴 뒤 브리저튼, 퀸 샬럿, 애나 만들기 같은 흥행작을 잇달아 선보이며 그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했죠. 포브스가 매긴 자수성가 지수(Self-Made Score)는 8점이며,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여성 셀러브리티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습니다.
“나는 내가 이 돈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한 번도 걱정한 적이 없어요. 나는 내가 버는 돈 한 푼 한 푼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포브스 참고: 기사 보기
두려움 대신, 오늘의 나에게 예스라고
2017년 숀다 라임스는 넷플릭스와 대형 계약을 맺고, 2020년 <브리저튼>으로 다시 한번 전 세계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리고 2026년 1월, <브리저튼> 시즌 4 파리 시사회 레드카펫에는 세 딸이 나란히 그의 곁에 섰어요. 이야기를 짓는 사람으로서의 삶과, 세 아이의 엄마로서의 삶이 마침내 같은 무대 위에 선 순간이었습니다.
숀다 라임스의 이야기는 “노력하면 너도 다 가질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걸 동시에 완벽히 해내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미뤄 둔 나 자신에게 이제는 “예스”라고 답해 보자는 다정한 권유에 가깝습니다. 오늘 하루, 무언가에 실패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면 — 그건 아마 당신이 다른 소중한 무언가에 온 마음으로 “예스”라고 답한 날이라는 뜻일 거예요.
📚 참고: 위키피디아 ‘Shonda Rhimes’,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Shonda Rhimes <Year of Yes>(Simon & Schuster), 2014 다트머스대 졸업식 연설(TIME), People·Forbes 인물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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