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자수성가 여성, 개발자 엄마, 파멜라 롭커
우리가 쓰는 물건 뒤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소프트웨어가 돌아갑니다. 공장에서 부품이 언제 들어오고, 무엇을 얼마나 만들고, 어디로 실어 보낼지를 조용히 계산해 주는 프로그램이죠. 그런 소프트웨어를 직접 코드를 짜서 만든 여성이 있습니다. 그것도 산타바버라의 작은 방에서, 혼자서요.
제조업용 소프트웨어 기업 QAD를 세운 파멜라 롭커(Pamela Lopker). 그는 개발자로 커리어를 시작해 남편의 샌들 가게에서 필요한 프로그램을 스스로 만들다가, 아예 회사를 차렸습니다. 그리고 1996년,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자수성가 여성으로 포브스 표지에 올랐어요. 오늘은 “그건 성공이 아니라 여정이었다”고 말하는, 두 아이의 엄마이자 개발자였던 이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여덟 번 학교를 옮긴 소녀, 스스로 길을 정하다
파멜라 롭커는 1962년 일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미 해군의 엔지니어였고, 그 때문에 가족은 자주 이사를 다녔어요. 파멜라는 12년 동안 여덟 곳의 학교를 옮겨 다녔고, 마침내 캘리포니아 쿠퍼티노에 정착했습니다. 자주 짐을 싸야 했던 어린 시절은, 어디서든 스스로 자리를 만들어 내는 힘을 길러 줬을지도 모릅니다.
어릴 때부터 그는 ‘여자아이가 하는 일’이라는 틀에 크게 얽매이지 않았어요. 학교에서 자동차 정비 수업(auto shop)에서 A를 받은 첫 학생이 되기도 했죠. 1972년 캘리포니아대학교 산타바버라 캠퍼스(UCSB)에 들어가 수학과 경제학을 공부했고, 1977년에 졸업했습니다. 대학에 들어갈 때 그의 마음가짐은 아주 현실적이었어요.
“대학에서 뭘 하면, 졸업했을 때 돈 잘 버는 직업을 얻어서 스스로를 부양하고, 집을 사고, 내 힘으로 내 길을 갈 수 있을까?”
안정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가정 환경은 그가 솔직히 인정할 부분입니다. 다만 그가 남달랐던 건, 그 배움을 곧바로 ‘스스로 먹고사는 기술’로 벼려 냈다는 데 있었어요.
레이더 소프트웨어를 짜던 개발자
졸업 후 파멜라는 캘리포니아 골리타의 한 해군 방산업체에서 레이더 방어 시스템 소프트웨어를 짜는 일을 맡았습니다. 지금처럼 개발 도구가 친절하던 시절이 아니었고, 여성 개발자가 흔하지도 않던 때였죠. 그는 이곳에서 실전 코드를 쓰며, 복잡한 문제를 프로그램으로 풀어내는 감각을 익혔습니다.
이 개발자 경력은 훗날 QAD의 진짜 밑천이 됩니다. 파멜라는 경영학 학위나 화려한 인맥이 아니라, ‘내 손으로 짤 수 있다’는 기술 하나로 자기 회사를 세운 사람이었으니까요. 훗날 포브스는 그를 두고 “거의 알려지지 않은 소프트웨어 창업가”라고 표현했지만, 정작 그가 만든 프로그램은 전 세계 공장을 조용히 돌리고 있었습니다.
남편의 샌들 가게에서 시작된 회사, QAD
파멜라의 인생을 바꾼 건 한 남자의 부탁이었습니다. 훗날 남편이 되는 칼 롭커(Karl Lopker)는 ‘데커스 아웃도어(Deckers)’라는 샌들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어요. 그는 파멜라에게 “판매·재고·배송을 관리할 소프트웨어를 좀 찾아봐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마땅한 프로그램이 없었어요. 여기서 대부분은 “없네”라고 끝냈겠지만, 파멜라의 선택은 달랐습니다. “그럼 내가 직접 만들지”라고 마음먹은 거죠. 그렇게 1979년, 그는 제조업의 거의 모든 과정을 다루는 소프트웨어 회사 QAD를 창업합니다. 회사 이름은 근처 도로 이름인 ‘퀸 앤 로드(Queen Anne Road)’의 머리글자에서 따왔다고 해요.
1981년 파멜라와 칼은 부부가 되었고, 회사는 부부가 함께 키웠습니다. 역할은 자연스럽게 나뉘었어요. 파멜라는 연구·개발과 코드를, 칼은 영업과 마케팅을 맡았죠. 개발자 아내와 사업가 남편이, 한 회사를 두 손처럼 나눠 든 셈이었습니다.

제조업의 숨은 엔진을 만든 ‘엄격한 소프트웨어의 여왕’
QAD가 만든 건 제조업용 전사적자원관리(ERP) 소프트웨어였습니다. 자재 계획, 수요 예측, 재고, 배송, 자금 관리까지 공장 하나가 돌아가는 데 필요한 흐름을 통째로 관리해 주는 프로그램이었죠. 자동차·전자·식음료 같은 제조업체들이 이 소프트웨어에 자기 공장의 신경망을 맡겼습니다.
회사는 꾸준히 자랐습니다. 파멜라는 1997년 8월 QAD를 나스닥에 상장시켰고, 2005년 무렵 QAD는 90여 개국에서 5,000곳 넘는 제조업체를 고객으로 두고 연 매출 약 2억 3,000만 달러, 직원 1,200여 명 규모로 성장했어요. 그리고 2021년, 부부가 40여 년 키운 이 회사는 사모펀드 토마 브라보(Thoma Bravo)에 약 20억 달러에 인수됩니다.
사실 세상이 그를 처음 주목한 건 훨씬 전이었어요. 1996년, 파멜라는 포브스 400 표지에 올랐습니다. 그해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자수성가 여성이었죠. 당시 추정 재산은 약 4억 2,500만 달러. 갑작스러운 유명세에 전화번호를 비공개로 바꾸고, 눈에 띄는 개인 번호판까지 떼야 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습니다. 경제지 포천은 그를 “미국 제조업의 영웅(Hero of U.S. Manufacturing)”, 그리고 “엄격한 소프트웨어의 여왕(Queen of Elegant Software)”이라 불렀고, 1997년에는 ‘여성 기술 명예의 전당’에도 이름을 올렸어요.
포브스는 이후로도 그를 미국 자수성가 여성 100인에 꾸준히 올렸습니다. QAD 매각이 마무리되던 2021년에는 순자산 약 7억 2,500만 달러로 43위에 이름을 올렸고, 최근에도 7억 달러 안팎의 자산가로 꼽혀요. 물려받은 게 아니라 스스로 일군 부라는 뜻의 ‘자수성가 점수(self-made score)’는 10점 만점에 8점. 한 명이 짠 코드에서 출발한 회사가, 세계 제조업을 떠받치는 기업이 되기까지의 거리였습니다.
엄마로서, 그리고 남편을 떠나보낸 뒤
파멜라와 칼은 두 아이의 부모이기도 했습니다. 회사를 세우고 키우던 그 세월은, 동시에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길러 낸 시간이기도 했어요. 개발과 경영을 부부가 나눠 들었다는 건, 일과 삶의 경계가 늘 겹쳐 있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창업가 부부가 회사도 가정도 함께 짊어졌던 거죠.
2018년, 남편 칼이 전립선암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칼은 데커스를 매각한 뒤 QAD의 CEO로 회사를 이끌던 사람이었어요. 오랜 세월 곁에서 회사를 함께 지어 온 동반자를 잃은 뒤, 파멜라는 롭커 가족 재단(Lopker Family Foundation)을 통해 암 치료 연구와 임상시험을 지원하는 일에 마음을 쏟기 시작합니다. 2021년 회사 매각 이후에는 이 일에 더 깊이 자신을 내어놓았어요. 슬픔을, 누군가를 살릴 연구로 바꿔 내는 방식이었습니다.
성공이 아니라, 여정이었어요
파멜라 롭커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정상에 오른 순간이 아니라 그 과정 전체를 이야기합니다. 늘 ‘다음 단계’를 향해 달렸지만, 결국 소중했던 건 도착지가 아니었다고요.
“제 커리어 내내 저는 늘 다음 단계로 올라가려 했어요. 하지만 이제 알아요. 그 성공의 지점에 도달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는 걸. 그건 여정이었고, 우리는 그 여정을 감사히 여기는 법을 배워야 해요.”
“끝나는 법은 없어요, 언제나 다음이 있죠”라고 담담히 말하는 그의 문장은, 하루하루 눈앞의 일을 해내며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잔잔히 남습니다. 마땅한 프로그램이 없자 “그럼 내가 만들지”라고 했던 그 태도처럼요. 없으면 만들고, 도착하면 또 다음을 향하는 삶.
엄마가 된다는 건 어쩌면 파멜라가 그랬듯, 정답이 없는 자리에서 스스로 답을 짜 나가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오늘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만의 코드를 한 줄씩 써 내려가는 엄마들에게, 그의 여정이 작은 응원이 되면 좋겠어요.
참고 자료
· Forbes, ‘Pamela M. Lopker’ 프로필(America’s Richest Self-Made Women)
· Forbes, ‘America’s Richest Self-Made Woman In 1996 Is Back’(2021)
· Wikipedia, ‘Pamela Lopker’
· UC Santa Barbara Magazine, ‘Journeying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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